요순이후 역사상 정치적으로 태평성대를 누렸던
조선 세종시대 때 전라도 강진의
조선 왕립도요에서 생산된
백상감 국화인화문 분청 접시(白象嵌菊花印花紋粉靑蝶)입니다.
테두리 부분의 튄 부분에 정교한 수리흔적 감지되며
비교적 상태 완벽하고 아름답습니다.
태종이후 정치가 안정되고 조선 개국에 참여했던 천한 신분계급들이
하루아침이 양반계급과 지배계급으로 부상됐습니다.
이 신진계급은 고려시대 때 신분적 제약으로 자신들이 꿈에 만 그리던
고려청자를 요청하게 됐습니다.
고려청자는 수요가 딸리게 되자 대량 생산에 들어갔습니다.
당초 고려청자는 이 청자가 최고조로 발전한 의종이후
무신정권의 집권으로 왕족과 왕만이 사용하던 고려청자는
무신들의 전유물이 됐으며 이후 맞이한 이민족의 외침으로
고려청자를 고급스렀게 만드는 것이 법으로 금지됐습니다.
30년 동안 몽고침입을 받았던 고려는 서울을 강화도로 옮겨가고
반도에 있던 모든 백성들은 산간벽지나 섬으로 들어가 한반도는
거의 공도가 됐습니다.
이 때 산간벽지나 섬으로 피란간 고려의 백성들은 토기나 대나무
밥그릇을 사용했습니다.
고려가 몽고에 항복하고 다시 본토로 돌아와 다시 고려청자를 맞이
하게 되나 고종 등 고려국왕은 여러차례 명령을 내려 도자기를 사치스
럽게 만드는 것을 법으로 금지합니다.
이렇게 해서 고급스렀게 만드는 것이 금지된 고려청자는 고려후기인
공민왕대에 와서 다시 옛날 방법대로 고급스렀게 제작되면 조선의
건국과 함께 고려청자 수요는 급속이 증가합니다.
모두 고려의 개국에 가담했던 천민들이 양반이나 왕족이 되면서
그들이 양반과 왕족의 흉내를 내기 위해 고려청자를 요청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공급이 딸리게 된 고려청자는 대량생산에 들어갔고
이 대량생산의 방법이 고려청자에 분을 바르고 나무에 국화꽃 모양
등의 문양을 새겨 흙으로 빚은 도자기에 인화문 도장을 찍어 백상
감을 넣는 기법입니다.
전통적인 고려상감기법에 비해 엄청나게 단조롭고 대량생산을 할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도자기에 상감을 넣은 기법은 조선에서 만 있었던 세계적인 기법입니다.
이 방법으로 대량생산되던 분청자기는 약 150-200만에 사양길에 들
어서게 되고 분청자기는 조선에서 사라진 것입니다.
이 인화문 분청자기가 더 아름다운 조선의 백자를 탄생시켰고 조선의
백성들이 아름다운 인화문 분청자기보다 아무 문양이 없는 백색의
조선의 백자를 선호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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