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말 경북지방의 유림으로 살다간 청송심씨 집안의 이산 심상길 선생의 시문집
상하 전 2책 중 하책입니다.
책에 붙여진 정확한 이름은 " 伊山文集 이산문집 " 하책..
이 책은 1936년 경북지방에서 선생의 큰아들 沈奎煥 님이 목판본으로 발행된 책입니다.
伊山 沈相吉 선생의 생애에 대해
선생의 이름은 相吉, 자는 泰元, 스스로 호를 伊山이라 지어 불렀습니다.
선생은 고려시대 문과에 급제해 벼슬을 지낸 심홍부 선생이 그 시조이며
고려말 전리판서를 지내고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들어가 절개를 지켰던
沈元符 선생과 병자호란 때 공을 세운 송호라는 호를 쓰신 훈련원 검정 심자광
선생이 그 선조입니다.
고조할아버지 심덕송은 효행이 남달라 군 여지도에 그 행적이 실렸으며
할아버지 심봉하 역시 효행이 남달라 그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修巖亭이라는
정자가 있습니다.
선생은 아버지 심성목과 큰어머니 전의김씨 응범과 작은어머니 전의김씨 응수의 따님
사이에서 1858년 태어났습니다.
선생의 아버지에게 시집온 어머니가 죽자 외갓집에서 외할아버지 형제의 따님을 다시
시집보냈습니다.
선생은 성품이 온아하고 지기가 강명했으며 얼굴이 아름다웠습니다.
선생은 동네 노인과 성인들을 부모처럼 받들고 섬겼습니다.
영남지방의 조선말학자 사미헌 선생을 스승으로 섬겼으며
독립운동가이자 유학자였던 회당 장석영 선생(1981-1926),
노백헌 선생, 독립운동가 이대계 선생, 유학자 극제 정지희
조선말 유림대표 겸 독립운동가 면우 곽종석 선생 등과 교우가 깊었습니다.
선생은 평생 벼슬하지 않고 유학을 실천하는 유림으로 살았습니다.
1905년 러일전쟁이 일어나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강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선생은 통곡한 뒤 문을 걸어 잠그고 지내시다가
조국 조선이 악랄한 일제 제국주의자들에게 강제 합방됐다는 소식을 듣고
통한했으며 1916년 병으로 누워 일어나지 못하고 자식과 손자를 불러
" 내가 병으로 일어나지 못할 것 같으니 너희들은 삼가 조상들의 유업을 지켜
文種을 끊지 말라! 내가 할아버지 수암정 중건을 보지 못하고 가니 성취하라"
또 선생은 아들을 규환을 불러 " 내가 죽은 뒤 가례를 근검하게 하고,
내 저서들을 수습하라" 고 유언한 뒤 5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선생은 丹山이라는 산 아래 서쪽의 바른 방향(正西)에 뭍히셨습니다.
이 단산이 문경 단산인지, 밀양 단산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여러 군데 단산이라는 지명이나 학교명이 나오는데..
이 책은 선생의 큰아드님이신 규환님이 발행했는데
책 뒤에 간기를 붙이지 않았습니다.
한국서지학은 이 책이 1936년에 발행됐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책에 실린 내용에 대해
이 책에는 선생이 남긴 편짓글과 잡저 행장 묘지명 발문 등이 실려 있습니다.
먼저 선생이 스승 사미헌 장선생에게 보낸 편짓글이 보입니다.
사미헌 선생의 조선말 경상도 지방의 유학자였습니다.
후산 허선생에게 올린 글도 두 통 보입니다.
또 역사에 유명한 독립운동가 겸 유학자였던 대계선생에게 보낸 편지가 두서 통
보입니다.
조선말 정극재 선생에게 보낸 편지가 보입니다. 이 분도 조선말 성리학 교과서에
나온 분이지요.
회당 장석영 선생에게 보낸 편지가 20여통 실렸습니다.
장석영 선생과 친했던가 봅니다.
회당선생이 1851년에 태어나 1926년에 돌아가시니 선생보다는 6살 선배였습니다.
조선말 유림대표였던 면우 곽종석 선생에게 보낸 편지도 보입니다.
책상태 매우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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